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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이야기/내가.지은.이야기

<철부지 마미> 3탄 -마지막회-


 

 엄마의 대응이란 게 참 유치한 것이었고, 가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빠라는 존재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에는 그런 추억들도 내게는 하나의 열등감으로 자리 잡고 만다.
 

 아빠가 있었더라면 아빠의 손을 잡고 나를 놀린 애에게 같이 가서 아빠 저애가 그랬어. 라고 한번쯤 손가락질해주면 될 텐데, 엄마가 그렇게 철없는 모양새로 꼬마를 놀리고 도망가지 않아도 아빠가 있었더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그 꼬마를 내 앞에서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럴 때면 같은 남자가 아니라면 도무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남자라는 족속들에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그런 족속에 무시당하는 여자라는 존재들에게도 동정이 생긴다.



 

 부서질 듯 닫고 나갔던 문을 열기가 민망해서 잠시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하고 나온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래도 20켤레면 십 만원인데 라는 생각이 더 앞서서 현관문을 빠끔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거실에 담요를 깔고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

 

“앗싸! 엄마 쌌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 안해! 


염병할 년, 지 에미한테 돈 뜯어 먹을라고하고."


 고스톱이다.



 쉰 여섯의 선글라스 할머니와 마흔의 우윳빛 피부 아줌마가 판을 벌렸다. 스물 셋의 딸은 어이가 없다.


 현관엔 정리하다 남은 스무 켤레의 신발들 중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가 엄마에게 소리쳤다.



 “신발 다 환불해 오랬잖아! 왜 아직 그대로 있어?”


 “얘야, 낙장불입(落張不入)이니라, 한 번 돈 내고 사온 신발인데 어떻게 환불을 하니?”


 
엄마는 고스톱 패를 섞으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엄마는 애써 밖에서 추스르고 온 불편한 내 심기를 다시 한 번 건드렸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해도 너무했다.



아무리 철없는 엄마라지만 남들처럼 우리가 미용에 패션에 신경 쓰면서 살 처지도 아니었다. 급기야 나는 담요를 뒤엎었다.


할머니가, 

"염병할 년, 나가리를 내고 지랄이여."

라고 소리쳤지만 들릴 리 없었다. 


 “엄마, 도대체 왜 그래? 우리가 색깔별로 디자인별로 구두 색깔 신경 쓰면서 살 처지야?
 
다달이 월세 내는 것도 힘들다며, 그럼 나한테 맨날 살기 힘들다고 불평이나 하질 말던가. 그리고 엄마 화장품 팔러 다니면서 굽 높은 구두 신고 다니면 발 아프다면서,  왜 쓸데없이 굽 높은 구두를 샀어!
 십만 원이면 쌀 한가마니를 사오든가. 아니면 백화점에 가서 비싸고 예쁜 걸로 딱 한 켤레만 사 신던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



 진작 이렇게 엄마한테도 할 말은 하고 살았어야했다. 이제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나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사는 것도 지쳤다. 그런데 내가 한참을 소리 질렀는데도 엄마는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그대로 거실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보고 있던 할머니는 엄마가 사온 신발을 가지고 와 내 발에 신긴다.

"야, 인년아! 너 내 딸 속 자꾸 썩일래?"


 할머니가 신겨준 신발은 나에게 감쪽같이 들어맞았다.

 아뿔사!
 
 신발이 내 발에 딱 들어맞는 순간, 큰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나는 미쳐 신발 치수를 확인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 발은 225mm, 싸게 파는 신발가게에서 스무 켤레나 사올 수 있을 만큼 쉽게 구할 수 있는 발 사이즈가 아니었다. 현관에 나가 구두의 사이즈를 모두 확인해보니 죄다 240이라는 숫자가 박혀있었다. 그래, 엄마는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그런 구두를 신지 못한다는 내 말이 맞긴 맞았다.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내 신발을 사왔으리라고는. 그것도 스무 켤레씩이나……

 

이제 막 후회를 좀 해볼까 하엄마가 방문을 활짝 열고는 소리친다.

                 "나쁜 년,  내가 언제 나 잘 살아보자고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았니?
              니가 스물 셋이나 됐는데도, 계집애가 되가지고 꾸미질 않아서 그랬다 왜!
                   엄마가 딸 신발 좀 사다준 것 같고 이렇게 엄마한테 소리를 지르니?

                        예쁘지 않은 신발이라서 그래? 비싸지 않은 거라서 그래?”


 어떻게 엄마를 달래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 한 팩과 목욕가방을  쥐어줬다.

 

“너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철이 없냐!

으이그! 잔소리말고 가서 니 에미랑 때나 밀고 와!”

 
하는 수 없었다. 아무리 철없는 엄마라도 엄만데, 철없는 엄마의 철없는 딸이 꼭 엄마 닮은 짓만 골라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엄마같이 살지 않겠다고, 엄마는 죽어도 닮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제길.

 콩콩콩 세 번, 조심히 엄마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심히 문고리를 돌려 살짝 밀어보았다. 엄마의 등 돌려 누운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엄마의 등 뒤로 가서 엄마를 안은 다음, 겨드랑이 사이로 내 팔을 넣어 엄마의 젖가슴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마미, 쏘리. 딸이 모르고 그런 거잖아. 정말 쏘리.”


 대답대신 들려온 것은 엄마의 쌔근쌔근한 숨소리였다. 엄마에게는 딸과 좀 더 티격태격 싸울 만큼의 시간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도 내일도 종횡무진 동네를 누비고 다녀야할테니.....
 
 오늘은 우유마사지를 확실히 해드리리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신발가게에 들러서 짝 바뀐 신발의 제짝도 다시 찾아와야겠다.